ARTICLE – GERARD XURIGUERA

La mise en situation du corps dans l’espace de la peinture est une constante historique, dont chaque artiste, selon l’époque, assume à sa manière la découverte illimitée. Mais de la très relative fidélité au référent à l’exaspération bousculée des formes organiques ou aux séquences de l’image éclatée rendue par une écriture parcellaire, tout, dans ces périmètres, nous ramène à l’homme et à son exigence intérieure.

La pratique de Kim Seon-Ja, si on souhaitait absolument lui trouver des parentés, s’inscrirait volontiers dans la postérité du courant narratif éclos au cours de la décennie soixante, mais à l’écart des incidences sociales, au large des archétypes, en ce qu’elle ne s’adosse qu’à la loi de sa propre syntaxe. Chez elle, la saisie du corps s’effectue par analogie, plus précisément, par le déroulement d’un trait continu-discontinu émaillé de biffures et de bifurcations, d’encoches et de brisures graphiques, où se rejoignent ordre et impulsion, sans opérer de disjonction entre l’essentiel et l’accidentel. Néanmoins nous n’avons pas l de véritable narration, si ce n’est un visage linéaire en surimpression, le galbe d’une croupe ou des attributs mammaires sommairement évoqués, qui se meuvent en apesanteur dans une liberté surveillée. Ses derniers travaux accentuent l’atmosphère de fragmentation et d’illusion réaliste distanciée mais jamais neutre, auxquels les appuis colorés de l’encre tranchant sur le blanc du papier, confèrent une tonique efficacité visuelle.

Réunissant en son regard une double culture, Kim Seon-Ja produit un art de la coupure, non pas pour parvenir à séparer, mais pour pouvoir au contraire obtenir des pièces à superposer. De sa formation coréenne à Pusan, étoffée à Paris, résulte un processus mixant la peinture asiatique, quasi calligraphique, et cette façon effrontée en vogue en Europe et en Amérique, de congédier l’image ou de la dé-figurer. La quête ascétique du vide, à l’œuvre depuis si longtemps dans les pays du Tao et du Nirvana, semble recoupée aujourd’hui par l’esthétique contemporaine de la disparition, installée à partir de l’abstraction.

Kim Seon-Ja commence par le simple appareil du dessin dénudé, faisant apparaître le corps tel qu’on le conçoit en Occident. Puis elle repasse au pinceau la silhouette en élans, la colorant de caresses subtiles, comme on esquisse en Orient les mouvements immobiles. Ce transfert s’étant réalisé sur un support translucide, affleure alors le décalque de corps nus
peut-être perçus au travers d’un papier de riz laiteux, tendu sur une tremblante cloison coulissante.

Toutefois, cette rêverie se confie aux mains d’une implacable opération : la matière somatique est soudain soumise au scalpel de ciseaux taillant à vif dans la structure du dessin, ciselant les tracés, déchirant les chaires, à l’instar d’une recherche en médecine légale, afin de cerner les causes de la mort qu’est l’image, immobile.

Maintenant, dans sa course serpentine tronquée souvent ramifiée et semée de fins boyaux, le trait s’articule en segments mitoyens jouant sur les réserves attenantes, pendant que dans les jumelages encre-photo, le geste souple et vaporeux s’accorde à la trace et à ses sédimentations. Mais quelle que soit la tournure élue, une heureuse unité y célèbre le mariage du corps et de l’esprit.



미술공간에서 인체에 대한 상황을 적용하는것은 항구불변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시대에따라 각자 예술가는 무한정한 발견을 그의 방식대로 표현하고 나타낸다. 아뭏튼 유기적이거나 조직적인 형태들을 깨뜨리고 뒤엎는 격분으로써 지시하는 대상을 매우 상대적인 정확성에서 표현하거나, 또는 세분화된 화법으로 실물에 충실한 표현으로 명백하고도 빛나게 파열하는 이미지의 스퀜스(연속적 요소)들이나, 온갖것들, 이 범위들에서, 우리에게 그의 정신적인 내면의 요구로 그리고 인간으로 환원한다.

김 선자의 작업에있어서, 만약 기어코 거기서 유사성이나 선조들을 찾기를 원한다면, 60년대 흐름에서 나타나는 narratif설화풍의 추세 또는 동향의 후세에 기꺼이 들어간다, 그러나 이 작업은 60년대 설화풍의 추세나 동향에서 보이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이며 상징적인 인간형태의) 외부적인 원형과는 거리가 멀고, 사회적인 반향이나 영향과는 차이를 두어, 그녀의 독창성과 독특한 언어로 이루어졌다. 그녀의 작업에서, 인체의 포착은 그래픽적으로 접히고 깨어지는 파편들과 끌자국 모양으로 파내고 새긴 자리들, 그리고 지우기 위해서 마구 그은 줄들처럼, 또한 갖가지 빛깔의 연속-중단된 필치의 기발한 표현과 특징으로 전개하여 펼치면서 더 명확해지고, 그리고 유추와 추론을 통하여 실현된다. 거기에서는 본질적이고도 근본적인 주안점과 우연성 사이를 분리시키거나 떼어놓지 않으며 활기있는 촉진력으로 그리고 질서있게 정돈된 상태로 서로 결합된다. 또한 그러기에, 거동에는 아무런 어색함이 없는 하나의 보호아래서 관찰된 자유로움과 경쾌함으로 무중력에서 움직이는 엉덩이 부분의 곡선과 윤곽, 또는 간결하면서도 약식으로 상기된 유방의 상징이나 특질, 또한 영화에서 보여지는거와 같이 이중인화된 일차적인 선의 얼굴이 아니기에 우리는 거기에서 사실적인 이야기나 서술적인 설화풍으로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녀의 지난 작업들에서는 눈으로 보아서는 사실주위적인 착각이나 단편적이고 일부분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듯 하지만, 그러나 흰 종이위에서 단호하게 자르듯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잉크의 착색을 강조하는 근거들에서 전혀 흐리다거나 불투명하고 선명치 않는것이 아닌, 오히려 강하고 힘찬 악센트가 있고 생기와 활기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시각적인 효과를 안겨준다.

이중 문화로 그의 시선이 결합되면서, 김 선자는 떼어 놓는다거나 분리나 분할을 위한것이 아닌 그와는 반대로 겹치고 포개어 놓으므로써 얻고자하는 부분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오리고 자르는 예술을 한다.
부산으로부터 그녀의 한국교육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그 내용이 풍부하고, 형체를 파괴하여 비–구상화 시키는것이나 또는 이미지를 (생각 따위에서) 몰아내게 하는 것은, 유럽 또는 아메리카에서 인기와 함께 유행한 이 파렴치하게도 방약무도한 예술양식과 방식에서 거의 서예같은 아시아풍의 그림을 동시에 혼합하여 과정과 절차로 부터 기인된 결과이다. 여백은 고형이나 금욕주의의 추구나 탐색, 도교와 열반의 나라에서 그토록 오랜동안의 작품에서, 추상작용의 출발로부터 자리를 잡아었고, 소멸과 사라짐이라는 현대미학 쪽으로 오늘날 일치되어 나타난다.

김 선자는 서양에서 우리가 그것을 이처럼 생각하는거와 같은, 이처럼 인체를 나타내면서 누드 뎃생을 단순한 도구로써 시작한다. 그 다음에 그녀는 동양에서는 부동의 움직임들 이라는 우리가 에스키스를 하는것 처럼, 섬세하고도 어루만지듯 가볍게 스치는 기분좋은 느낌의 채색으로 열정과 약진하는 붓으로 윤곽(실루엣)을 다시 그린다. 반투명한 바탕위에서 실현되어진 이 이동은, 그러기에 미닫이의 간막이 위에서 팽팽히 당겨진, 아마도 유질의 쌀종이를 가로질러 지각되는, 이같은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가끔, 이 황당무계한 몽상은 집요하고 냉혹하게 작용하는 두손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긴다 : 육체라는 물질적인 재료는 움직임이 없는, 이미지다 라는 죽음의 이유를 분명히 구분지으면서, 법의학의 연구에 따라, 생살을 찢고, 자취나 흔적을 잘라내면서, 뎃생의 구조와 짜임새안에서 힘차고 날카롭게 잘리는 가위의 메스에 느닷없이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가느다란 창자를 뿌리고 자주 가지치기를 하여 주요부분을 잘라낸 뱀같은 나선관의 흐름안에서, 필치는 바로 곁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신중함들과 경계를 이루는 (구분된)선분들을 관절처럼 이어붙이고 연결시킨다. 동시에 잉크와 사진의 접합에 있어서, 유연한 제스처와 그리고 수증기처럼 얇고 가벼움은 그들의 침적작용에 따라 또한 흔적이나 자국에따라 일치하여 조화롭게 어울린다. 하지만 선정된 맵시나 기풍이야 어떻든간에 행복한 결합은 거기서 육신과 정신의 합체로 찬양하고 경축된다. (주석 ; 다시말하면 표현하는 방식이야 어떻든간에 작품의 결과에 있어서 통일성과 조화가 잘 되면 좋은 작품이다.)